2009년 9월 30일 수요일

인터넷 물병 편지



요즘 인터넷 상에는 랜덤챗이 유행하고 있다.

 

접속하게 되면 말그대로 랜덤 하게 대화 상대를 엮어주어..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방식이다.

 

기존에 채팅이 주제(?)를 가지고 있는 대화방이란 곳에서 여러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거 였다면, 이 랜덤챗은 전혀모르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Blind Date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기대감이라던지… 묘한 즐거움이 생기는 거 같다.

 

그리고 여기.. 인터넷 물병편지라는 것이 생겼다.
























말그대로 물병 편지..

누군가에게 어떻게 전해질진 모르지만… 내 이야기를 담아서 던지면.. 어디론가 가서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그 물병편지가.. 인터넷이란 바다를 떠돌게 되는 것이다.

물병편지 쓰기를 누르고 글을 써서 물병을 보내면.. 누군가에게 가게 된다.

그리고 그림처럼 해변가에 도착한 물병을 클릭하면 누군가가 보낸 물병 편지를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컨셉이란 생각과..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개발자 싸이 주소는 http://www.cyworld.com/max7th  이다.

 

Technorati 태그: 물병편지,인터넷 물병편지,랜덤챗

2009년 9월 29일 화요일

인터넷은 안되고 네트웍 공유는 되도록

 

요즘 N세대라 불리는 친구들은 이전 세대들보다 컴퓨터에 익숙하다.

 

99년도에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컴퓨터를 처음 접해본 사람들이 많았던걸 감안하면, 유치원생들도 인터넷을 하는 요즘은 세대는 확실히 기존 세대들 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듯 하다.

 

수업용으로 갖다놓은 PC에서 학생들이 공유된 수업 동영상을 보기 보다는 인터넷과 메신저 질을 한다며 고민하는 친구를 위해서 간단하지만 강력한 방법을 소개해 본다.

 

1) TCP/IP 등록정보 > 고급탭을 누른다.

image

 

 

2) 옵션탭에서  TCP/IP 필터링을 선택, 밑에 속성 버튼을 누른다.

image

 

3) TCP/IP 필터링 사용을 체크하고, TCP포트에 다음만 허용 선택,

image

 

4) 추가 버튼을 눌러서 137~139번까지 입력 한 후 확인을 누른다,

image

 

인터넷및 메신저들이 되는지 확인해본다. ^^

 

이것은 인터넷 공유가 가능한 포트만  놔두고 모든 포트를 막아 버리는 방법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인터넷 할 넘 들은 한다.

설정을 초기화 시키거나 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면 속수무책이다.

애초에 학생들이 사용하는 피씨에 로그인한 계정이 대부분 Administrator계정이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예 공유기 차원에서 포트를 막아버리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공유기 마다 설정이 판이하고, 또 안되는 공유기도 있기에.. 둘중에 더 나은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한가지 방법으로는..

host파일을 수정하는 방법이 있다.

c:\windows\system32\drivers\etc\hosts

라는 파일을 열어서.. 마지막줄에

127.0.0.1 nate.com

이라고 추가해 두면.. nate.com이란 주소를 쳤을때 웹페이지 탐색이 취소 됐습니다~ 란 내용을 볼 수 있다.

이 방법은 특정 사이트만 차단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는데..

127.0.0.1이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특정 페이지(공부해라 이놈들아~)등으로 활용할 수 도 있다.

 

기타 궁금증은 리플로 달면 상세한 답변 들어가겠다 ㅎㅎ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PP 오더 마감(오더상태)

생산오더 방식에서 오더 정산
계획오더 -> 생산오더 -> 부분적 확정 -> 납품완료 -> 기술적 완료 -> 클로징 –> 정산
순서로 진행된다.

 

오더를 생성하고, 확정, 납품(DLV)등의 경우 반드시 일어나는 기본적인 오더 상태 변화지만
기술적 완료 와 클로징은 굳이 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다.

 

기술적 완료를 하더라도 실적 관련 트랜잭션을 발생할 수 있다. (확정, 백플러쉬, 입고)
하지만 생산오더 및 종속소요량이 없어지게 되는 상태이다.
실행보다는 계획쪽 관련 내용이 없어졌다고 보면 된다.

 

오더를 클로징 하게되면 계획 및 실행이 완료가 됐다고 보기 때문에 실적처리는 할 수가 없다.

 

image 
<CO02에서 기술적 완료를 하는 모습>

 

 

기술적 완료를 하게 되면 오더의 상태가 TECO 상태로 바뀌게 되며, 클로징을 하게 되면 오더의 상태는 CLSD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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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10일 목요일

엑셀 입력 받아 인터널 테이블에 넣는 방법


CALL FUNCTION 'ALSM_EXCEL_TO_INTERNAL_TABLE'
  EXPORTING
      filename                = p_fname
      i_begin_col           = l_ibcol
      i_begin_row          = l_ibrow
      i_end_col              = l_iecol
      i_end_row            = l_ierow
  tables
    intern                      = gt_xls
EXCEPTIONS
   INCONSISTENT_PARAMETERS       = 1
   UPLOAD_OLE                                      = 2
   OTHERS                                                = 3
          .


  CALL FUNCTION 'KCD_EXCEL_OLE_TO_INT_CONVERT'
    EXPORTING
      filename                = p_fname
      i_begin_col           = l_ibcol
      i_begin_row          = l_ibrow
      i_end_col              = l_iecol
      i_end_row             = l_ierow
    TABLES
      intern                                  = gt_xls
    EXCEPTIONS
      inconsistent_parameters      = 1
      upload_ole                         = 2
      OTHERS                           = 3.

 

  SORT gt_xls BY row col.

 


  LOOP AT gt_xls.
    MOVE gt_xls-col TO l_index.

    ASSIGN COMPONENT l_index OF STRUCTURE gt_upload TO .

    MOVE gt_xls-value TO .

    AT END OF row.
      APPEND gt_upload. CLEAR : gt_upload.
    ENDAT.
  ENDLOOP.

 


아래 함수는 위 작업을 한번에 해준다.
  CALL FUNCTION 'TEXT_CONVERT_XLS_TO_SAP'
    EXPORTING
      i_field_seperator    = 'X'
      i_line_header        = 'X'
      i_tab_raw_data       = lt_raw_data
      i_filename           = p_fname
    TABLES
      i_tab_converted_data = gt_upload
    EXCEPTIONS
      conversion_failed    = 1
      OTHERS               = 2.

 

단 이 함수를 사용할 경우 한글이 깨지거나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면,  SAP GUI 패치를 해야 한다.

2009년 9월 8일 화요일

이탈리아군 전설

기원 전 510년
시바리스라는 도시 국가에서 승리 축하 퍼레이드를 위해
군의 기마대에 소속된 말들을 음악에 맞춰 춤을 추도록 교육했다.
헌데 국가의 운명을 건 결전에서 상대편에서 음악을 연주하자
기마대의 말들이 전원 대혼란.
결국 대패


1866년 6월
20만의 이탈리아군은 알프레히트 대공이 이끌던 오스트리아군 7만 5천에게 대패


1866년 7월
국가 통일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에게서 베네치아를 손에 넣으려 벌였던 리사 해전
리사섬을 공격하기 위해 이탈리아 함대가 취한 행동은 아래와 같다.
첫번째 출항, 바다위에서 장황한 연설을 하는 것으로 끝
두번째 출항으로 리사섬을 한바퀴 쭈욱 돌아보는 유람으로 끝
세번째 출항 때는 마지못해 일단 싸우긴 했다.
오스트리아 측은 배 한대도 잃지 않은 반면, 이탈리아 군은 배 3척을 잃음


1895년
에티오피아에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이 원주민에게 대패
그 전에 이미 한번 더 진 적이 있기 때문에 연속 2연패
6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대패였다.


1896년
다시금 에티오피아와 싸움.
에티오피아군 1000여명의 사상자 발생
이탈리아군 5000여명 사상자 발생


1917년 10~11월
독일, 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대패
독일 오스트리아 연합군 사상자 2만 3천
이탈리아군 사망 1만, 부상자 2만, 포로 29만 3천, 탈주병 30만.


1918년 10~11월
오스트리아군과 휴전 교섭을 맺은 상태에서 상대를 공격, 포로 30만명 획득


1922년
에티오피아 재차 침략
비행기, 전차 같은 신무기를 초기부터 배치하며 밀어붙였지만, 엄청나게 빨리 패배.
에티오피아군은 구식 전장식 총기가 주류였던데다, 심지어 창으로 무장한 병사도 있었다.


1937년 3월
이탈리아 4개 보병 사단, 진군 도중 투항자가 속출.
싸우지도 않고 패주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영국,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 포고.
이는 히틀러를 질투한 무솔리니의 독단적 행동이었으로, 아무런 계획도 없었음.
덕분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이탈리아 선박은 전쟁 개시 며칠 안에 전부 나포됐다.
선전 포고 이후에도 따로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10일 동안 아무 일도 안했다.
이후 기습으로 전쟁을 시작, 헌데 고작 2개 사단에 막혀서 후퇴


1940년 6월
독일군에게 당해 항복 직전이던 프랑스에 침공을 감행
프랑스군에게 반격당해서, 만일 프랑스의 항복 선언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되려 이탈리아 영토가 침범당할 뻔 했다.


1940년 10월
이탈리아군 21개 사단의 그리스 침공,
그리스군 13개 사단에게 반격 당해서, 이탈리아 군은 와해 직전 상태로 알바니아로 패주
그리스는 친독일적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일로 연합군 측으로 돌아선다.


1940년 12월
이집트에 침공한 이탈리아군 7개 사단,
영국군 2개 사단의 반격을 받고 13만명이 포로가 된다.


1940년 10월
영국 해군의 구식 복엽기 소드 피쉬 21기가 항구 도시 타란토에 있던 이탈리아 함대를 공격.
전함 1대 대파, 2대 중파.
영국측 손해는 소드 피쉬 2기 격추.


1942년
이탈리아군 25만과 영국군 3만 5천이 전투, 튀니지에서 항복.


1942년 12월
이탈리아 8군이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모든 병기를 내버리고 도주.
이하 잉여 전설
북부아프리카에서, 영국군 장교한테 총을 든 이탈리아 병사 무리가 항복하려고 다가갔다.
헌데 전리품 찾는다고 바쁜 그 영국군 장교가 자신들을 무시하기에
이탈리아 병사들은 그의 옆에 총을 내던졌더니 영국군 장교가
[시끄러!! 저리로 꺼져!!]
이렇게 소리치기에 별 수 없이 항복을 받아줄 다른 영국군을 찾아서 사라졌다고.

 


2차 세계 대전 당시 포로로 획득한 이탈리아 병사는 절대 고문을 하지 않았다.
알아서 자기가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 주니까.


케냐산은 아프리카에서 두번째로 높은 산으로
2차 세계 대전 도중 이탈리아 병사 세명이 정상 (4985 m)에 도전해서 첫등정에 성공했다.
그들은 영국군에게 잡혀 있던 포로들로
포로 수용소에서 매일 그 산을 보는 중, 한번 올라보고 싶었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 루트를 검토하면서 반년 동안 식료품을 모으고 등산 도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탈주, 80Km 거리를 걸어 마침내 등정 성공을 이뤄냈다.
이후 이들은 수용소로 당당하게 복귀했다.
영국군은 이들의 기행이 너무 기가 막혀서 단지 몇주 동안의 독방형만을 내렸다고.


어느 날 한 이탈리아 병사가 잠을 자던 중, 인기척이 느껴져 깨니
소대장이 어딘가 가는 게 보였다. 병사는 그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그러자 소대장이 답했다.
「나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 생각 없어! 노예가 아니니까!」
짐을 챙긴 소대장은 멋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목숨을 걸 때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다!」
이런 말을 하면서 탈영하려는데, 앞서 병사가 소리쳤다.
「대장! 기다려 주세요!」
뒤돌아 본 대장에게 병사가 소리쳤다.
「나도 같이 갑니다!」
이후 하루 하루가 지날 때마다 병사들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영국군과 전투가 시작되기 전, 이미 그 소대 자체가 사라진 상태였다.


나폴리에서 군함을 도둑 맞았다.


전쟁을 안할 때의 이탈리아군은 매우 강하다


북부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영국군 패잔병을 찾으려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헌데 영국군은 원주민 부락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이들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이탈리아군은 현지 원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국병 한명당 설탕 5봉지에 밀가루 5봉지」
다음날, 영국군 전원을 잡을 수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독일, 일본, 이탈리아군 포로를 모아둔 수용소가 있었다.
독일인은 집단으로 구멍을 파서 탈주를 시도했다.
일본인은 집단으로 자결해버렸다.
이탈리아인은 수용소 문을 열어놔도 될 정도로 조용했다.
그리고 근처 민간인 여자를 꼬셔서 가정을 만든 사람이 나왔다.

전설의 777부대

1978년 2월의 어느날,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가 키프로스에서 암살범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이 암살범들은 키프로스 정부로부터 DC-8 여객기를 빼앗아 30명의 인질을 잡고 도주하였으나 착륙을 허가 해주는 공항이 없자 키프로스로 회항하고 인질30명을 붙잡고 키프로스 정부와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죽은것을 안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은 인질의 구출과 암살범을 체포하기위해 45명의 사이카 특공대를 키프로스로 출동시켰습니다.

이 명령은 사전에 키프로스와 사전에 교감이나 통보를 하지 않은체 이루어진 일이였고 이에 키프로스 군은 이집트군을 무장테러리스트로 오인하여 사격을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이집트 사이카 특공대 45명중 15명이 키프로스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으며 애시당초 암살을 시행한 암살범 2명은 투항했습니다.

이런 무개념적인 행동은 국제사회로부터 이집트 정부가 비난을 받았지만, 당시 우방을 선언한 미국은 "테러리스트와 타협하지 않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평가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집트의 사이카 특수부대는 777부대로 이름을 개명하고 미국의 네이비 씰,등 각국 대테러 특수부대의 교관을 초빙하는 등 높은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1985년 10월 이집트 항공 737 여객기(위의 사진)가 말타 섬 부근에서 무장 테러리스트에 의해 하이재킹(공중납치)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네이비 씰 교관을 초빙하는 등 특수부대에 심혈을 기울인 777부대는 마침내 출격을 명령 받았습니다.과거의 경험으로 이집트 정부는 말타정부로부터 착륙허가를 받아내고 출격하였습니다.777부대는 훈련에서 배운대로 기체에 도청기를 설치하는등 인질들의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고 TV로 생방송 중계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인질들과 테러리스트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777부대원들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몇명씩 나눠 협상을 하기위해 접근할때 2명의 부대원들은 몰래 기체위에다 폭약을 설치하여 기체 위에 구멍을 낸 뒤 테러리스트를 제압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애시당초 설치한 폭약이 너무 많이 설치되어 터지자마자 비명소리와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으며 사방으로 피가 튀겼습니다.또한 그 폭약 밑에 있던 인질 20명이 한꺼번에 사망하였습니다.생방송으로 이집트 전역에 방송하던 중계 리포터는 약간 당황한듯(-_-;) 했지만 환호하며 국민들에게 777부대의 활약(?)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폭발로 인한 먼지가 갈아 앉을때까지 777부대는 2분여간 대기 하고 전투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이 순간 이 상황을 지켜보다 흥분한 신입 부대원이 기체 위 폭발로 구멍이 난곳으로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이에 놀란 다른 부대원들도 이따라 수류탄을 모두 던졌습니다. 그것도 파편 수류탄을 말이죠.안에 있던 인질들은 걸레가 되어 영문도 모른체 죽어갔고 이집트 방송에서는 특수부대의 성공적인 진압이 다가오고 있다며 환호 하는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습니다(-_-)..그리고 아까 그 수류탄을 던진 부대원이 총을 들고 들어가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난사하였습니다.파편수류탄에 맞아 신음하던 인질들은 고통에 움직이다 온몸에 파편+총알이 박히고는 모두 전원 사망 하였고 이때도 이집트 방송에서는 성공적인 진압을 자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이전과 같이 "테러리스트에게 굴복하지 않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평가하였으며 이집트는 전 국제적인 맹비난을 받았으며 인질 100명중 사망 57,부상 40명으로 사실상 모든 인질이 죽거나 다쳤습니다.그럼에도 이집트 777부대에는 아직도 '업적'란에 이같은 대테러진압사건이 당당하게 올라있답니다--;;;

2009년 9월 5일 토요일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담론

 


황유복 교수 논문

[논문개요]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민해 온 민족 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리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아직 우리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론쟁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조선족을 보는 시각은 다르다. 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이 아니다. 세상에 이중성민족은 없다.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민족집단(族群)의 한 부분이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핵심어] 조선족, 정체성, 이중성민족, 민족집단

 

들어가면서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이민이나 그들 후예로 구성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다. 조선민족의 중국이주의 역사는  고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왕조시기에 정치, 군사, 경제 및 기타 원인으로 발생된 이민 활동은 1945년 광복당시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17세기이전에 이주한 고대이민들의 후대들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족, 몽고족, 만주족 및 기타 민족에 흡수, 동화되어 그들의 흔적을 역사문헌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조선족"이란 개념은 중국국적을 취득한 이민자 혹은 그들 후대 중에서 중국행정당국의 승인을 거쳐 "조선족"으로 분류된 자를 말한다. 조선이민이나 그의 후대가 아직 중국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거나(조선교민, 한국인 영주권자), 혹은 조선이민의 후대가 이미 다른 민족 집단구성원으로 되었을 때 그들을 조선족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관찰해보면 조선족의 중국이주형태는 17세기 전쟁이민(war migration), 주로 후금의 “정묘호란”과 청의“병자호란”피랍인; 19세기 후반기의 자유이민(free migration); 1910년대의 망명이민(exiled migration); 1920년~1945년의 일제 식민정책에 따른 관리이민(impelled migration)등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현재의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 중에서 소수의 17세기 고대 이민의 후대 (하북성 청룡현과 요녕성에 산재해 있는 박씨 후대들)들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150여년을 넘어선다. 그러나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 공동체의 형성은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 개최로부터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까지로 볼 수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의 르네상스시대는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사회발전과 인류 진보를 위한 새로운 문화중심의 패러다임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아직 우리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론쟁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인가?”라는 담론은 민족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러한 담론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선 조선족 사회나 문화를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민족이나 문화에 대한 체계적 리론의 부재도 원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게 된다.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되기까지

 

  중국에서 조선민족을 중국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최초의 문헌은 1928년 7월 9일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통과된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문》이다. 그 후에 작성된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문헌자료에서 시종일관하게 중국 조선 민족을 중국소수민족으로 인정하였다. 다만 민족 명칭을 “고려인”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특이하다.
    그런데 그 시기 조선민족 이민들이 집중 거주하던 동북지역은 중화민국정부에 귀속되는 동북군벌정권의 유효 행정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 행정부가 조선민족 이민을 중국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사실상 외국거류민 으로 취급되었다. 1945년 항일전쟁승리 후의 몇 년 사이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조선민족 이민들이 자의에 의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하는 사람들과 남아있을 사람들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동북국은 그 당시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한국거류민’, ‘조선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민현장에 남아 영주할 결심을 한 조선민족구성원 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여 받았고 지방정권수립에 참여하여 참정권을 갖게 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점차 탈바꿈 하게 되였다.
    1950년 12월 6일자 《인민일보》는 “중국동북경내의 조선민족”이라는 논설에서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가 개막되면서 동북경내의 조선인민은 중국경내 소수민족의 자격으로 각 형제 민족들과 만나게 되였다. 그때부터 중화인민 공화국 각 민족 인민가운데 이 새로운 구성부분은 각 형제민족 인민들의 관념 가운데서 교민으로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인민들로부터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1949年9月,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开幕,东北境内的朝鲜人民,以中国境内少数民族的资格,和各兄弟民族见了面。从此,中华人民共和国各族人民间这个新的组成部分,才在各兄弟民族人民的观念里,以侨居中国的朝鲜人民中区划出来。)”라고 지적하였다.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조선민족이 조선교민으로부터 중국 소수민족으로 탈바꿈한 시간을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 회의 개최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조선인민”, “조선민족”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어 “조선족”이란 이름은 1951 년에서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는 그 사이에 확정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 내이션(nation)과 에트닉(ethnic)

 

  민족에 대한 리론 가운데 개혁개방 전까지 우리가 경전으로 꼽았던 쓰딸린의 민족에 관한 정의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외에도 프랑스 철학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이란 무엇인갬,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독일의 력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의《허구의 민족주의》등 민족에 관한 저서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들이 담론하는 “민족”은 “근대민족” 혹은 “자본주의민족”, 즉 민족을 봉건왕조국가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난 문화적 조형물로 인식하고 있다. 
  1903년, 량계초(梁啓超)가 독일학자의 민족개념에 관한 글을 번역하면서 서구의 “민족”이란 단어가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다. 내이션(nation)은 겨레, 국민, 국가 등 복합적 개념이 어울려진 용어이다.  여기에서 내이션은 정치적 령토와 관련되는 민족개념이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민족주의”, 내이션 스테이트(nation state)는 “민족국갚 라는 뜻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은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국민+민족”이다 . “한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漢민족”이고 “몽골족” 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몽골민족”이며 “조선족” 역시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민족”이다.
  서구의 “근대민족”과 달리 조상과 혈연을 중시하던 동방에서는 고대로부터 “겨레”라는 뜻의 담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1882년 청나라 학자 왕도(王韜)가 《양무재용기소장(洋務在用其所長)》에서 사용한 “민족(民族)” 은 중국의 민족개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나 녀진인들과 구별하기위해 “아족류(我族類)”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민족” 혹은 “우리겨레”라는 뜻이 분명하다. 1960년대 이후 서양에서도 에트닉(ethnic)이란 용어가 출현했다. 내이션이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면, 에트닉은 정치적 공동체인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중국에서 “族裔”로 번역하고 있는 에트닉(ethnic)은 우리말로 ethnology를 “민족학”으로, ethnicity는 “민족성”이라고 하듯이 역시 “민족”이라 번역한다. 그리고 중국에서에 “族群”으로 번역하는 에트닉그룹(ethnic group)은 민족집단으로 번역한다.

 

코메리칸과 조선족

 

  나는 1987년~1988년에 미국의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에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담당한 적이 있다. 사회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미국국적을 취득한 한국인들을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komerican-코리아와 아메리칸의 합성어)이라고 호칭한다. 왜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호칭하는데 미국에서는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이라고 하는가?
건국 력사가 200여년밖에 안 되는 미국은 총인구의 1%를 차지하는 인디언원주민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세계 각국에서 온 외래 이민이거나 이민의 후예들이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민족이란 계념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이민 왔나 로서 국민들을  분류한다. 1929년에는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국가별로 이민 수자를 할당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아일랜드계미국인, 프랑스계미국인, 중국계미국인 등으로 불리 운다. 한국인들의 미국이민은 1965년 새 이민법이 시행되면서 대규모로 진행되기 때문에 미국국적을 취득한 후 미국의 관례대로 한국계미국인으로 호칭된다.
그러나 중국은 수 천 년 력사를 가진 나라이고 고대로부터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민족학자들의 노력으로 민족 식별작업을 거쳐 56개 민족(nation)으로 국민을 분류하게 되었다. 150여년의 이민 력사를 가진 조선민족도 1945년 이 후 중국에서 토지와 참정권을 부여받으면서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으로 인정되고 한족, 만족 등 민족과 동등한 위치에서 조선족으로 호칭되게 된다.
  한국에서 “한국계미국인”이라는 호칭에 반발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조선족”이라는 호칭에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사실, “한국계미국인”은 한국에서 이민 온 미국인이라는 뜻에서 “미국인”이라는 국적이 강조되었다면 “조선족”이라는 호칭에서는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라는 뜻에서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

 

조선민족과 한(韓)민족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리 민족집단(ethnic group)은 령토의 분단, 민족의 분단과 함께 민족 명칭의 분단이라는 아픔도 함께 겪게 된다. 조선반도의 북과 남에서 각각 “조선” 과 “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면서 하나의 민족집단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호칭되게 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리념대립이 살벌해지면서 민족 명칭의 갈등도 심각해졌다. “한민족”그룹에게 있어서 “조선민족”은 “빨갱이”들의 대명사정도로, 그리고 “조선민족”그룹에게 있어서는 “한민족”은 “반동분자”들의 대명사나 다름없이 여겨져 왔다.
  1985년 내가  쯔꾸바대학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을 때 일본에서는 조총련과 한국민단이 대립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어느 방송사가 우리말 강좌를 개설하면서 강좌이름을 한국어강좌라 하면 조총련에서 반발하고 조선어강좌라 하면 민단에서 반발하기 때문에 나중에 “안녕하십니까” 강좌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1983년에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소개하는 글을《China Reconstructs》1983,No,3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글을 한국의 《동아일보》가 번역해서 게재할 때 제목을 “<中共속의 코리아> 延邊自治州” 라고 했고 글 가운데 나오는 “중국”은 “중-공”으로, 조선족은 “韓人”이라고 번역했다. 신문을 보고 나는 너무나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1984년 겨울,  내가 코네티컷대학의 초청으로 미국에 갔을 때 뉴욕에서 발간되는 한 한글신문의 글 부탁을 받고 나는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고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전제로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실태와 그의 장런라는 론문을 발표했다. 동서방의 리념대립이 아직도 살벌했던 그 당시 서방진영의 심장에다 “조선족”이라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거부감을 주는 이름을 심어놓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미국과  일본의 신문, 학술지에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 “中國の朝鮮族 その素顔” 등 여러 편의 론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기간 나는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서울대학교 등 10개 대학 의 초청강의를 담당하면서도 “조선족” 홍보를 계속했다.
오늘까지도 인터넷사이트에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놓고 한국네티즌들과 조선족네티즌사이에 쟁론을 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랭전시대의 유물이 쉽게 해소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조국과 고국사이      

 

같은 한자 어휘가 한어와 조선어에서 완전히 다른 뜻을 나타낼 때가 가끔 있다. “조국”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한어에서는 “자기의 나라(《현대한어사전》)”, 즉 자기에게 공민권을 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한국에서는 “(1)조상 때부터 살아온 나라, (2)민족의 일부 또는 국토의 일부가 떨어져 딴 나라에 합쳤을 때 그 본디의 나라(《국어사전》)”라고 정의 했다. 쉽게 말해 중국은 내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이라 하고 한국은 조상이 살던 나라를 조국이라 한다. 중국의 정의에 따르면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고 한국사전의 해석에 준하면 조선족의 조국은 한국이나 조선이어야 한다. 두 나라의 “조국”이라는 명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감정상의 껄끄러움을 불러오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민해 온 민족 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중한수교를 전후하여 한국에서는 중국 조선족을 “재중한인”으로 호칭하다가 지금은 “재중교포”, “재중동포” 혹은 “조선족동포” 라고 부른다. “재중한인”이란 호칭은 내이션(nation)의 개념을 적용한 용어이므로 한국이나 조선 국적을 포기한 조선족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교포”는 거주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경우를 지칭해야함으로 역시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겨레라는 뜻이 강조되는 에트닉(ethnic) 개념으로 풀이되는 “동포”는 적당한 호칭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한민족동포(ethnic)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과거 어려운 시절 조선반도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민해 왔고 중국의 혁명과 개발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국민의 자격을 취득한 일개의 소수민족(nation)이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분명히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갈래이지만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10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국가의 령도 층 에도, 군의 장성에도, 학계의 최고 위치에도)진입한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중한수교이후 한국 사람들과 접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중축구경기가 있을 때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의 저변에는  “한국과 중국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라는 관심이 깔려있다. 사실상 조선족은 60여 년 전에 이미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나는 하버드대학연구보고서(1988)에서 “1950년대 초반기에 형성된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철저한 탈조선(국가)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에서 영주할 생각과 조선민족적인 것을 현지에서 키워가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라고 지적했다.
이중성 민족은 없다

 

조국과 고국의 시각 사이에 끼어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적지 않은  학자들이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아래에서 인용하게 되는 글은 어느 개인을 념두에 둔 것이 아니고 “이중성 민족론”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인용상의 편의를 위한 것임을 집고 넘어가겠다.
  “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바꿔말하면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며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며 조선반도의 국민과 동일선상에 있는 조선민족이다. 따라서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있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있기에 국가와 민족이란 이 두가지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확한 정치적인 안목과 명철한 현실감각, 미래지향적인 원견이 있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학술적으로 토론의 대상으로 조차 상정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술관점의 문제가 아닌 개념정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중성이란 말의 개념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선어나 한어에서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에 겹쳐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국어사전》),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 즉 하나의 사물에 구비된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성질”(“指事物本身所固有的互相矛盾的两种属性,即一种事物同时具有两种互相对立的性质。"《现代汉语词典》)을 말한다.
  례를 들어 갑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어느 중학교의 교사이고 그에게는 을남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을남이의 아버지이고 동시에 중학교사이기 때문에 갑돌이에게 이중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사”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갑돌이가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두었다면 이중혼인이 불법으로 인정되는 중국에서 갑돌이는 합법과 불법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의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의 이중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개 나라의 국적을 소유했다면 그는 이중국적자이다. 만약 조선족의 절대다수가 중국과 한국(조선)의 국적을 동시에 취득했다면 조선족은 이중국적민족으로 이중성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중국적을 승인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가설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조선족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조선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라면 민족의 혈연적(ethnic--“族裔”)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적어도 현제의 조선족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국적과 민족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하나로 묶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라 할 수는 없다.
  어느 교수는 나에게 “조선족은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族群)에 속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기 때문에 이중성민족이 아니냐?”라고 물어왔다.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가 존재하느냐라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만약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 와 “중국 조선족”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 “조선민족(族群)” 속의 전체와 일부분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중국에는 조선족 이외에도  같은 민족집단(ethnic group--“族群”)이 중국국경선 밖에 독립된 단일민족국가를 갖고 있는 소수민족으로 로씨아족, 몽골족, 까자흐족, 따지크족, 우즈베크족, 따따르족 등 7개 민족이 있다. 그리고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절반이 넘는 33개 민족이 소위 과계민족(跨界民族)이다. 그 어느 민족도 자기민족이 이중성 민족이라 하지 않는다. 이중성민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민족?

 

허구의 “이중성민족론”이 조선족위상에 주고 있는 부정적 영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수준에까지 미치고 있다. 2002년 8월23일,《인민일보》사이트에 소하(肖河)가 쓴 “56개 민족은 한 가족, 중국은 이 모든 민족의 나라(五十六个民族是一家,中国属于所有这些民族)”라는 글이 실렸다. 저자는 민족과 종교 사업에 종사하다가 은퇴한 자기아버지의 말을 빌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세력의 활동일 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离心离德) 민족은 도리어 선족(鮮族), 즉 조선족이다. …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들(조선족)은 중국과 정체성을 달리 한다”라고 했다. 그의 글을 읽는 순간 나의 느낌은 우선 자제되지 않는 분노 그 자체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하(肖河)는 일반 네티즌이 아닌 북경대학교수였다. 그런데 중국의 민족정책에 관한 어느 좌담회에서 내가 소하의 조선족에 대한 비틀어진 인식을 비판하자 옆에 있던 한 한족출신의 교수가 조심스럽게 “지금은 조선족학자들이 자신들은 이중성민족이라고 주장하지 않느냐? 조선족학자들만 사용하고 있는 그 말의 뜻은 자신들이 중국사람인 동시에 한국(조선)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해왔다. 그때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 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렬사가 가장 많은 민족,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 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다.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중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해야할 조선족 젊은이들이다. 총명, 근면, 지식 등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자질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불신 때문에 그들의 길이 막혀진다면 그것은 우리세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주류민족이나 기타 형제민족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면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대들이 귀중한 생명까지 바쳐 우리세대가 중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는 우리 후대들의 주류사회진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제발 허구의 “이중성민족론”으로 그들의 앞길에 걸림돌을 설치하지는 말자.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법 학자로서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한국계미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직위인 국무부 차관보를 지냈던 예일대학 법과대학원 학장 헤럴드 고(고홍주)는 “한국계미국인으로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라는 한국 《중앙일보》기자의 질문에 “성인이 된다는 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시점에 나는 100%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몇 % 한국인이고 몇 % 미국인인가 고민하다가 ‘100% 한국계미국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더니 쉬워지더군요.”라고 대답했다.
  1987~88년 내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계미국인사회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기위해 사회조사를 할 때 대부분 코메리칸지식인들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미국국적을 딴 후 한국 사람들로부터 “축구경기응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자기 자신들과 후대들의 미국주류사회 진입을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문화와 차별되는 미국 코메리칸문화의 창출해야 한다고 인식을 같이 했다.
미국의 코메리칸사회의 미국이민 력사는 1903년 7천226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이민한 사건을 제외하면 불과 4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300년 이전에 이민해온 “박가촌”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중국조선족사회의 이민력사는 150년이나 된다. 오랜 력사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조선족문화도 창출해냈다. 우리는 조선족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해야할 리유가 없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민족집단(族群)에 소속되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럴드 고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면 된다.
  1992년 중국과 한국간의 수교가 단행되면서 조선족과 한국간의 내왕이 잦아지게 된다. 많은 한국인들이 고국을 찾아온 조선족동포들을 따뜻한 겨레(ethnic)의 정으로 맞아주었고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조선족들도 한국경제인들의 중국진출을 도와 나섰다. 2006년, 한국보다 10년 먼저 중국과 수교를 실시한 일본은 대중경제교류에서 256억 달러의 적자를 보았지만 한국은 도리어 254억 달러의 흑자를 얻었다. 조선족과 한국인과의  협력관계는 2003년부터 중국이 한국의 최대수출대상국이 되고, 2008년 말 한국의 대중국수출액이 820억 달러로 상승되는 일이 가능케 했다.
  우리자신과 후대들이 중국 주류사회진입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중국에서 계속 타민족의 칭찬을 받는 민족으로 거듭날 때 조선족은 축구경기 때 한국 팀을 응원하는 정도가 아닌, 조국과 고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를 포함한 전 방위적인 교류를 위해 더 많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황유복 :  중앙민족대학 교수,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회장

2009년 9월 2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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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text
    Error at assignment: Overwritten protected field.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Error in the ABAP Application Program

    The current ABAP program "SAPLSLVC_FULLSCREEN" had to be terminated because it
     has
    come across a statement that unfortunately cannot be executed.

오류분석
    A new value is to be assigned to the field "<L_BOX>", although this field is
    entirely or partly protected against changes.

…………

 

ALV가 뿌려지고 난 뒤 뒤로가기, 더블클릭 등 어떤 액션이 취해지던 저런 에러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ALV에서 이런 에러가 발생했다면..

십중팔구 필드 카테고리와 화면에 뿌려진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난 항상 필드카테고리에는 CheckBox가 없는데.. 화면에 뿌릴때는 CheckBox를 넣고 뿌려서 이런 경우가 많다…